1.
의도를 빗겨가는 수 많은 경우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이며 쓰레기로 인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닐을 지목한다. 그래선지 사용을 자제하자는 말을 자주 접한다. 누군가는 당장 비닐사용 줄이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비닐이나 비닐봉투를 정책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한다. 개인의 사용자제가 효과적일 것 같아 장바구니를 사용하자는 캠페인에 동참해도 모든 포장은 이미 비닐에 담겨져 나온다. 하지만 이미 위생관념이란것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포장되어 있지 않은 상품에 대한 불신은 팽배하기 때문에 대안이 분명치 않다. 편의적 발상으로 인한 인간의 행동으로 쓰레기는 쌓여 충분히 예상가능한 재앙을 만들어내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 우연히 영국 BBC 온라인 뉴스채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터뷰 클립영상을 보게 되었다. 스웨덴의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에 대한 기사였다. 툴린씨는 종이봉투를 쓰기 위해서는 수 많은 나무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고 비닐봉투를 개발한 사람이었다. 종이는 쉽게 찢기고, 물에 약했기에 다시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반면 비닐은 접어 넣고 다니기 쉽고, 질긴데다 습기에 강했기에 재사용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결국 비닐봉투를 개발한 배경에는 환경에 대한 관찰과 상념이 담겨있다.
메시지는 대다수 의도를 포함한다. 동의와 공감과 무관하게 곡해될 가능성과 편의에 의한 변형이 동시에 발생한다. 2020년 현재를 사는 청소년과 예술교육 역시 자유롭지 않다. 문명과 문화는 예술과 함께 해왔지만, 시대에 따라 그 행위자의 지위가 달랐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예술은 모두가 누려(?)야 하는 영역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경험재인 예술과 예술행위를 배우고 익히고 싶어한다. 그렇게 예술교육이 대중으로 존재하는 아동/청소년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책과 사업을 세팅하고 수행인력과 예산을 배정했다. 공공성을 탑재한 예술교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본래의 의도는 예술과 예술가를 접하면서 세계관이 넓어지고, 자연스러운 예술행위로 만나게 되는 자기성장을 독려하자는 것이다. 의도는 그러하다. 허나 교육의 현장과 예술교육의 장면은 조금 다른 그림이 펼쳐진다. 입시를 위한 학교와 학원의 스케줄에 밀려 선택이 한정적이고, 부모의 정보에 의존하다 보니 선호와 무관하거나, 동기없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이때 예술교육은 스케줄을 피해 짧은 시간 성과를 내야 하는 과제를 떠 안고, 학습자의 동기를 조작적으로라도 부여하느라 정작 예술행위와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보다 자극의 요소와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청소년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접속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예술가와 대화하면서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경험의 장은 과연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부터 용산을 기획하는 것은 불확실하고 불가능한 상상인가.
2. 용산_도구의 본질에서 예술과 과학을 찾다.
인간의 역사에서 도구사용의 숭고함은 더 피력할 이유가 없다. 바퀴의 발명은 어느 누군가의 공이 아니라 수 많은 경험의 총합이다. 바퀴는 단지 이동의 편의성을 가져온 도구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을 바꾸어 놓았다. 각종 역병을 막은 역사에서 신약개발과 의술의 발달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리창문의 보급은 세균과 곰팡이를 줄였다. 도구의 사용이 문명을 만들고 지식과 문화를 전승하고 인간 수명을 늘여갔다. 그것은 수 많은 시도와 실패의 경험이 만들어낸 인류의 자산이지 어떤 특정한 인물과 집단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영웅에 가까운 인물의 혁신적인 생각이나 마일스톤을 세우는 것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단지 혁신적인 생각과 행동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에 어떤 시도와 실패가 있었는지가 중요해 보인다. 우리사회의 “교육”이란 꼬리표를 달고 있는 절대다수의 배경에는 “교육자”의 패키지가 존재한다. 이유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효율성이다. 단시간에 많은 수의 피교육자가 단기목표를 달성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패키지화된 교육에는 시도와 실패가 삭제될 수 밖에 없다. 그 패키지를 만든 교육자의 시도와 실패만이 존재한다. 즉, 교육상품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교육소비자에게 판매하기 위한 것인데 그 안에서 도구를 만나기 힘들다. 주목할 것은 놀이의 요소다. 룰이 정해진 상품화된 놀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를 말한다. 놀이의 필수요소는 1)놀이시간의 확보 2)도구와 또래 3)평가로부터 자유로움 4)반복 5)놀이공간 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자유로운 시/공간적 환경과 프레임밖의 도구가 만날 때 자연발생한다.
누군가 시킨적이 없는데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 어떻게 하면 될까라고 질문하면서 시도하고, 실패해도 평가받지 않는 상황. 패키지에 담겨 있지 않아서 도구를 찾아가는 경험. 이런 경험이 예술과 만나게 한다면 부가이윤으로 창의력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우리가 지금 시도하려는 것은 청소년이 당연히 청소년기에 해야 마땅했던 질문과 자기 선택을 제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질문을 예술가가 해야 하는 몫으로 남긴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지가 과제다.
3. 무엇을 할 것인가_워크숍의 큰 테마
도구의 본질_망치와 톱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위험하기도 하고 유용하기도 하다. 이것은 모든 도구의 특징이다. 이는 저작도구도 마찬가지다. 페이크나 선동에 가까운 뉴스들이 횡횡하게 된 것은 저작도구를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이지 도구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에게 도구를 만나게 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도구를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길이를 재는 도구, 성형을 위한 도구, 재료를 담거나 이동하는 도구라고 제안하면 그 도구를 어떻게 만들것인가를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자, 망치, 그릇으로 명명하면 상상력이 제한된다. 이미 그렇게 만들어진 도구를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도구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은 길이를 재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표준을 만들어서 약속으로 사용하는 이유등에 대한 다양한 자기 기준을 설정하는 학습이 병행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물리적 성질을 가진 도구만을 대상으로 둘 필요는 없다. 도구를 만들어가는 과정안에서 사용해야 하는 도구가 있고, 때로는 컴퓨터를 만들거나 컨트롤러를 통해서 조작가능한 도구를 만들어야할 때도 있다.
아뜰리에 초대_다양한 재료를 실험하고 이런 저런 발상으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들은 시도와 실패를 반복한다. 그리고 갤러리나 퍼포먼스를 통해 사람들을 만난다. 현재의 사회와 문화에 말을 건다고 할 수 있다. 교육은 그 작품을 흉내내는데 있지 않고, 그 아뜰리에에서 했던 시도에 있다. 재료를 찾는 과정부터 정제하거나 선택하고 작품이 되기 바로 직전까지가 “학습과 배움”의 코드다. 용산은 아티스트가 아뜰리에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설계한다. 공간만으로 한정하는 아뜰리에를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 초대의 장이 되는 일종의 상징이다.
표현의 통로_ 미디어는 장르가 복합적이며 교육은 매스미디어를 읽고 쓰는 media literacy와 multimodal literacy가 동시에 거론된다. 이는 복합장르의 미디어와 AI나 UX가 미디어와 끝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디어를 선택하지 않는 예술교육과 작업은 거의 없다. 광의로 표현하자면 예술은 미디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미디어의 선택적 결합이 자유로와 지면 그 만큼 표현의 영역이 넓어진다. 여전히 어떤 도구를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4. 자기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다.
예술가가 교육씬에 들어서며 청소년에게 가장 많이 듣고 싶은 말은 “이렇게 만들고 싶어요” 또는, “왜 이렇게 될까요?”라는 질문이다. 반면 청소년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걸 언제 다해요”라거나, “이렇게 하라구요?”라고 되질문을 받는다. 흔히들 말하는 닮고 싶은 어른과 꼰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이 두 가지 경우를 살펴보게 된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 절대다수의 부모는 온라인을 통해 양육의 방법을 결정한다. 이미 자기를 키워본 경험을 가진 그들의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려 들지 않게 되었다. 배밀이가 늦다고 느끼거나 또래 아이들보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가 적을 때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라고 나서는 사람들의 수도 많아졌다. 그래서 경청의 기술을 배우려 강의를 듣고, 뇌발달에 좋다는 약을 먹이기도 한다. 경험의 총합이 만들어낸 지혜는 두 시간의 특강으로 요약하며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양육자가 된 듯 하여 경쟁을 미화하며 행동한다. 집단지성이라는 태그를 붙이고 등장한 지식의 양이 늘고, 교육전문가가 수 없이 등장한 우리사회에 아동과 청소년은 행복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20세 전후의 청소년을 만나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분명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잘 따랐고 잘 해냈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했고, 경쟁에서 살아 남으라고 해서 우위에 섰지만 막막함이 앞서는 이유를 궁금해한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분명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으랴고 위안을 하지만 현재 그들이 느끼는 막막함의 실체는 생애 최초의 장벽이어서 끝없이 높아 보일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단, 한가지는 분명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대상이 자기자신에게 돌아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것이다. 그 질문 연습을 해야 하는 청소년시기에 그들이 만나는 어른들은 항상 솔루션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질문을 자기에게 돌릴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용산은 예술가와 만나 영감을 나누고, 테크놀로지의 본질을 찾고, 장르의 경계에서 관조와 참여를 결정하는 자발적인 질문의 공간이 되고자 한다.